<조원득 작가론>
 
사회적 폭력의 계보학
 
김홍기 / 미술평론가
 
 
 
괴물과 맞서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너의 시선이 심연의 바닥을 오랫동안 꿰뚫어 볼 때, 심연도 역시 너를 꿰뚫어 보고 있다.”
_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중에서.
 
조원득의 초기작들은 방구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작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의 한 손에는 붓이, 다른 손에는 거울이 들려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먼저, 방구석을 떠올린 까닭은 그의 초기작들이 주로 집안에서 겪은 개인적인 폭력의 경험과 그 기억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폭력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고 구석에 내몰리게 만들지 않는가. 다음으로, 거울을 떠올린 까닭은 작가가 몸소 폭력의 현장에 머물렀을뿐더러 다른 당사자들도 전부 가족의 구성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가의 입장에서 날 닮은 남자날 닮은 여자’, 또는 내가 닮은 남자내가 닮은 여자일 터이니 거울에 비친 작가 자신의 모습에서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흔적이 모두 발견될 수 있었으리라.
방구석에서 거울을 들고 그리는 회화는 강렬하고 극단적인 정서를 발산하지만 그만큼 제한적인 전달의 가능성을 띠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의 내밀한 사적인 기억에서 길어 올린 정서의 수직적 깊이는 대개 소통의 수평적 넓이와 반비례하기 때문이며, 거울에 비친 작가 자신(과 그의 가족)의 배타적인 이미지는 관객의 온전한 이입을 좌절시킬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의 가족사에 기반을 둔 회화는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손쉽게 남성과 여성의 구분으로 환원할 여지도 품고 있었다. 물론 가족과 사회를 불문하고 남성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가하는 폭력은 여전히 엄연한 현실이며 첨예한 문제이지만, 폭력 그 자체는 그보다 더 복합적인 방식으로 성찰되어야 한다. 강자가 약자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단지 성차에만 기반을 두고 있지 않으며 온전히 일방적이지도 않다. 성차의 역학관계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역학관계 등과 중층결정되어 있고, 폭력은 대항폭력과, 합법적 폭력은 비합법적 폭력과 상호 의존하면서 변증법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2011년 이래로 조원득의 회화는 폭력의 이런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양상을 다루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집밖으로 나서서 보다 넓은 범위의 사회와 공동체에 내재한 폭력성을 화면에 담아내기 시작한다. 자신을 비추던 거울을 들고 방구석을 박차고 나와 집밖의 모습을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스탕달이 소설이란 길목을 거닐며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한 것처럼, 조원득의 회화는 세상의 길목에 널린 폭력적인 상황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개인적인 가족사를 벗어난, 사회의 폭력적인 리얼리티가 그의 회화에 이미지로 맺히게 된 것이다. 집안에서 작가가 방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처럼, 길목에 나선 그의 거울은 사회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구석구석을 비추고 다닌다. 때로는 골목의 후미진 모퉁이가, 때로는 담벼락의 모서리가, 때로는 야트막한 산속의 빈터가, 아니면 정확히 어딘지 잘 식별되지 않는 모래밭이나 물가가 그의 회화의 배경이 된다. 사회적 폭력에 의해 움츠러든 존재들이 내몰린 곳, 또는 은밀한 방식으로 사회적 폭력이 저질러지는 곳, 그런 구석진 자리들에 작가는 집요하게 거울을 들이민다.
조원득이 여섯 번째 개인전 <잘못된 게임>(2016)에서 선보인 회화들은 사회의 폭력성에 관한 그의 회화적 성찰이 다다른 장면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그의 초기작에 등장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여성이었던 것에 반해, 그의 최근작들은 여성 못지않은 수의 남성으로 채워져 있다. 차라리 그의 회화 속 인물들의 성별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어떤 인물들은 남성인지 여성인지 확실히 말하기 어려운 외모를 띤다. 성별 이외에도 여러 다른 구별들로 이루어진 사회 속에서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경우에 따라 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또한 폭력이란 이성 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남성이 남성에게 여성이 여성에게 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성별에 상관없이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이 있다면, 약자가 강자에게 대갚음하는 대항폭력도 있고, 약자가 자기보다 더한 약자에게 가하는 상대적이고 연쇄적인 폭력도 있다.
그렇다고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일시함으로써 폭력의 현실 자체에 면죄부를 부여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폭력의 이런 복합적인 성격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있다. 조원득은 오늘날의 사회 시스템 자체가 어떤 불평등한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에서 차별과 폭력의 원인을 발견한다. 우리는 모두 잘못된 게임의 한복판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상대방이 무엇을 냈는지 뻔히 알면서도 패하는 수를 낼 수밖에 없는 게임(<Rule>), 바늘 없이 실만 있는데 바늘에 실을 꿰어야 하는 과제를 떠맡은 게임(<잘못된 게임>), 이처럼 이미 무게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게임의 규칙이 오늘날의 사회 시스템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규칙이 사회 구성원 각자가 처한 위치에 따라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배분하는 것이다. 이런 배분에 기대어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린치를 가하는 상황이 정당화된다(<잘못된 게임>). 이것이 조원득의 회화가 형상화한 오늘날의 성과사회의 살풍경이다. 이곳은 이기는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으로 들끓는 곳이며, 지는 자리에 내몰린 자들이 마치 주검처럼 나뒹구는 곳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불평등한 시스템의 사회가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각축전에서 탈락한 듯한 사내가 맨발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까닭 없이 히죽거리고 있고, 그의 바로 옆에 놓인 비석에는 바르게 살자라는 도덕적인 문구가 새겨져 있어 그의 행색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잘못된 게임>). 마치 그가 사회에서 도태된 이유가 전적으로 그가 바르게 살지 못한 데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이렇듯 낙오와 패배의 원인은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이 아니라 개인의 잘못에서 찾아야 하는 것처럼 호도된다. 그리고 낙오자에게 가해지는 유무형의 폭력은 개인의 악덕에 대한 응당한 단죄로 합리화된다. 폭력이 합리화되고 성패가 선악과 동일시되는 사회 속에서 모든 구성원들은 결코 해소할 수 없는 불안과 불신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피할 수 없다. 그 누구도 다가올 실패의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 누구도 이마에 주홍글씨가 새겨져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만인이 잠재적 폭력에 노출된 사회 속에서 불신과 경계의 벽은 끊임없이 높아만 간다. 사람들은 모래밭에서 터져 나온 작은 불꽃에도 소스라쳐 뒤로 나자빠지고, 산속의 빈터에서 정체 모를 검은 물체를 맞닥뜨릴 때 과민한 경계심이나 과중한 불안감에 휩싸이고 만다(<그 순간>). 불시에 닥쳐올지 모를 폭력에 언제나 불안해하는 것이다. 이런 항시적인 불안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조원득은 초기 작업부터 동물의 행태에서 한 가지 실마리를 얻은 듯하다. 언제나 포식자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먹이사슬 하단부의 동물들은 깃털을 곤두세우거나 눈을 희번덕거리며 위협의 제스처를 취한다. 즉 주변의 폭력에 맞서 자기 스스로 폭력성을 연기하는 것이다.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가해자인 것처럼 스스로를 위장하는 것이다. 작가는 약자의 위치에서 분노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폭력을 위장하는 유사한 제스처를 발견한다. 한밤중에 나무 위에 올라가 위태롭게 나뭇가지를 붙들고 서 있는 어린아이는 눈에 섬뜩한 쌍심지를 켜고 있다(<요동치다>). 이처럼 사회적 약자의 자리에 놓인 어린아이는 두 눈을 부라리며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폭력성을 연기하는 것이다.
폭력을 위장하는 이런 전략은 생존을 위해 꽤나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조원득은 위장의 전략이 내포한 위험성을 잊지 않고 지적한다. 그것은 폭력을 위장하다가 폭력을 내면화해 버리게 될 위험성이다. 즉 폭력이라는 괴물과 맞서 싸우다가 스스로 괴물이 되어 버릴 위험성이다. 잘못된 게임의 승자를 위협하기 위해 연기하던 패자의 폭력적 제스처가 부지불식간에 폭력 그 자체의 행사로 변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만일 폭력이 일종의 질병이라면 그것은 난치병일 뿐만 아니라 지독한 전염병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내면화된 폭력은 게임의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행사된다. 정면의 무언가를 응시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을 보라(<그 순간>). 하나같이 거부와 외면의 의사를 담은 폭력적인 시선들이다. 다만 한 어린아이만이 옅은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아이가 곧 겪게 될 사회화 과정을 상상해 본다면 아마도 그 미소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폭력과 맞서 싸우면서 폭력을 내면화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사회적 폭력의 구조적 근원, 달리 말하자면 잘못된 게임의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규칙을 끈질기게 누설하고 폭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원득이 회화를 거울삼아 짊어지고 길목을 누비면서 하고 있는 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