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적 신체로서의 얼굴
 
 
작가 조원득의 작품소재는 인간의 얼굴이다. 작가는 자신과 타인의 얼굴표정을 세세하게 화폭에 그려낸다. 일체의 색을 다 빼버리고 목탄과 검은색 분채, 호분과 젯소를 사용하여 흑백명암으로 처리한 얼굴은 사뭇 괴기적이다. 이러한 표현은 신비하면서도 화려한 색감을 추구하던 그녀의 이전작업에서 색감이 가진 의미의 군더더기를 모두 없애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그것은 예술적 언어에 대한 기대와 오해, 그리고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는 작가라는 행동양식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마치 흑백사진이 컬러사진에 비해 더욱 사실적이고 풍부한 이야기를 전달해주듯이, 그녀의 작품은 초상화가 가진 재현적 영역을 크게 벗어나 단지 얼굴의 모습이 아닌 그 이면에 있는 함축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여기서 얼굴은 소녀이자 작가 자신이며, 언니,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오빠의 모습이다. 바로 가족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얼굴의 표정들은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고, 혹은 아픔을 애써 참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왜 이들의 모습은 이처럼 우울하며, 불행한 표정들일까? 이러한 물음은 작품의 의미를 상처, 트라우마, (), 자기연민이라는 이야기로 몰아간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단지 상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 속에서 결정지어지는 인간의 삶과 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타인과의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또는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아픔의 경험, 그리고 그것의 기억을 표현한다. 특히, 그녀는 작품의 시발점인 가족구성원에서부터 사회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힘과 권력, 남성과 여성, 강자와 약자와 같은 이분법적 원칙이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는 사회시스템에 대해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저항의 의지를 표명한다.
작품 <날 닮은 남자>, <날 닮은 여자> 시리즈는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고스란히 닮아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아픔과 상처라는 것이 단지 타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것임을 인식하게 한다. 그러나 자아는 사회적 구조에 의해 생겨난다. 사회적 삶이라는 굴레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돌고 돌아서 언제나 아픔을 만들어내는데 작가는 이러한 굴레를 무의식의 밑바탕에 자리하는 아픔의 그림자라고 지칭한다. 언제나 자신을 따라다니며 아픔이라는 기억을 상기시키는 자아의 무의식적 그림자는 사회적 역할 시스템을 몸으로 익히게 한다. 그것이 바로 억압인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미지는 사회적 약자로서 상처를 간직하게끔 유도하는 신체적, 정신적 억압시스템에 반대하고 도전하는 저항적 신체로서 자아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녀의 작품에 괴기스러움과 그늘이 서려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처에 대한 기억을 속 시원히 다 토해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픔을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고자 한다. 정화는 자신의 모든 것들을 토해내어 카타르시스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카타르시스는 단지 자기만족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삶과 관계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한다. 자신의 아픔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의 극복의지를 내비치는 그녀의 작업은 바로 자아성찰의 과정인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고립되고 소외된 자아는 그녀 자신이자 상처를 간직한 모든 이의 모습이다. 거기엔 상처를 주는 사람 또한 포함된다. <약육강식>의 체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약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깃을 세워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위협을 가해야 한다. 마치 동물들의 싸움처럼.
작가의 얼굴은 바로 이러한 그림자를 간직한 사회적 인간의 표현인 것이다. 흑백의 그림은 이제 사회 구조에 대한 저항을 넘어서 치유를 드러낸다. 이러한 신체를 통하여 그녀는 가족, 그리고 사회구성원 등 모든 사람들의 관계를 긍정으로 되돌려 놓고자 한다. 그것은 관계 맺기의 능동적 통로인 내면적 자아와의 만남인 것이다.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기엔 우리 모두의 얼굴이자 얼굴의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다.
 
| 백 곤 미학
<조원득 작가론>
 
사회적 폭력의 계보학
 
김홍기 / 미술평론가
 
 
 
괴물과 맞서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너의 시선이 심연의 바닥을 오랫동안 꿰뚫어 볼 때, 심연도 역시 너를 꿰뚫어 보고 있다.”
_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중에서.
 
조원득의 초기작들은 방구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작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의 한 손에는 붓이, 다른 손에는 거울이 들려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먼저, 방구석을 떠올린 까닭은 그의 초기작들이 주로 집안에서 겪은 개인적인 폭력의 경험과 그 기억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폭력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고 구석에 내몰리게 만들지 않는가. 다음으로, 거울을 떠올린 까닭은 작가가 몸소 폭력의 현장에 머물렀을뿐더러 다른 당사자들도 전부 가족의 구성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가의 입장에서 날 닮은 남자날 닮은 여자’, 또는 내가 닮은 남자내가 닮은 여자일 터이니 거울에 비친 작가 자신의 모습에서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흔적이 모두 발견될 수 있었으리라.
방구석에서 거울을 들고 그리는 회화는 강렬하고 극단적인 정서를 발산하지만 그만큼 제한적인 전달의 가능성을 띠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의 내밀한 사적인 기억에서 길어 올린 정서의 수직적 깊이는 대개 소통의 수평적 넓이와 반비례하기 때문이며, 거울에 비친 작가 자신(과 그의 가족)의 배타적인 이미지는 관객의 온전한 이입을 좌절시킬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의 가족사에 기반을 둔 회화는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손쉽게 남성과 여성의 구분으로 환원할 여지도 품고 있었다. 물론 가족과 사회를 불문하고 남성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가하는 폭력은 여전히 엄연한 현실이며 첨예한 문제이지만, 폭력 그 자체는 그보다 더 복합적인 방식으로 성찰되어야 한다. 강자가 약자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단지 성차에만 기반을 두고 있지 않으며 온전히 일방적이지도 않다. 성차의 역학관계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역학관계 등과 중층결정되어 있고, 폭력은 대항폭력과, 합법적 폭력은 비합법적 폭력과 상호 의존하면서 변증법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2011년 이래로 조원득의 회화는 폭력의 이런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양상을 다루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집밖으로 나서서 보다 넓은 범위의 사회와 공동체에 내재한 폭력성을 화면에 담아내기 시작한다. 자신을 비추던 거울을 들고 방구석을 박차고 나와 집밖의 모습을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스탕달이 소설이란 길목을 거닐며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한 것처럼, 조원득의 회화는 세상의 길목에 널린 폭력적인 상황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개인적인 가족사를 벗어난, 사회의 폭력적인 리얼리티가 그의 회화에 이미지로 맺히게 된 것이다. 집안에서 작가가 방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처럼, 길목에 나선 그의 거울은 사회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구석구석을 비추고 다닌다. 때로는 골목의 후미진 모퉁이가, 때로는 담벼락의 모서리가, 때로는 야트막한 산속의 빈터가, 아니면 정확히 어딘지 잘 식별되지 않는 모래밭이나 물가가 그의 회화의 배경이 된다. 사회적 폭력에 의해 움츠러든 존재들이 내몰린 곳, 또는 은밀한 방식으로 사회적 폭력이 저질러지는 곳, 그런 구석진 자리들에 작가는 집요하게 거울을 들이민다.
조원득이 여섯 번째 개인전 <잘못된 게임>(2016)에서 선보인 회화들은 사회의 폭력성에 관한 그의 회화적 성찰이 다다른 장면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그의 초기작에 등장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여성이었던 것에 반해, 그의 최근작들은 여성 못지않은 수의 남성으로 채워져 있다. 차라리 그의 회화 속 인물들의 성별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어떤 인물들은 남성인지 여성인지 확실히 말하기 어려운 외모를 띤다. 성별 이외에도 여러 다른 구별들로 이루어진 사회 속에서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경우에 따라 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또한 폭력이란 이성 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남성이 남성에게 여성이 여성에게 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성별에 상관없이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이 있다면, 약자가 강자에게 대갚음하는 대항폭력도 있고, 약자가 자기보다 더한 약자에게 가하는 상대적이고 연쇄적인 폭력도 있다.
그렇다고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일시함으로써 폭력의 현실 자체에 면죄부를 부여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폭력의 이런 복합적인 성격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있다. 조원득은 오늘날의 사회 시스템 자체가 어떤 불평등한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에서 차별과 폭력의 원인을 발견한다. 우리는 모두 잘못된 게임의 한복판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상대방이 무엇을 냈는지 뻔히 알면서도 패하는 수를 낼 수밖에 없는 게임(<Rule>), 바늘 없이 실만 있는데 바늘에 실을 꿰어야 하는 과제를 떠맡은 게임(<잘못된 게임>), 이처럼 이미 무게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게임의 규칙이 오늘날의 사회 시스템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규칙이 사회 구성원 각자가 처한 위치에 따라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배분하는 것이다. 이런 배분에 기대어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린치를 가하는 상황이 정당화된다(<잘못된 게임>). 이것이 조원득의 회화가 형상화한 오늘날의 성과사회의 살풍경이다. 이곳은 이기는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으로 들끓는 곳이며, 지는 자리에 내몰린 자들이 마치 주검처럼 나뒹구는 곳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불평등한 시스템의 사회가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각축전에서 탈락한 듯한 사내가 맨발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까닭 없이 히죽거리고 있고, 그의 바로 옆에 놓인 비석에는 바르게 살자라는 도덕적인 문구가 새겨져 있어 그의 행색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잘못된 게임>). 마치 그가 사회에서 도태된 이유가 전적으로 그가 바르게 살지 못한 데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이렇듯 낙오와 패배의 원인은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이 아니라 개인의 잘못에서 찾아야 하는 것처럼 호도된다. 그리고 낙오자에게 가해지는 유무형의 폭력은 개인의 악덕에 대한 응당한 단죄로 합리화된다. 폭력이 합리화되고 성패가 선악과 동일시되는 사회 속에서 모든 구성원들은 결코 해소할 수 없는 불안과 불신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피할 수 없다. 그 누구도 다가올 실패의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 누구도 이마에 주홍글씨가 새겨져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만인이 잠재적 폭력에 노출된 사회 속에서 불신과 경계의 벽은 끊임없이 높아만 간다. 사람들은 모래밭에서 터져 나온 작은 불꽃에도 소스라쳐 뒤로 나자빠지고, 산속의 빈터에서 정체 모를 검은 물체를 맞닥뜨릴 때 과민한 경계심이나 과중한 불안감에 휩싸이고 만다(<그 순간>). 불시에 닥쳐올지 모를 폭력에 언제나 불안해하는 것이다. 이런 항시적인 불안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조원득은 초기 작업부터 동물의 행태에서 한 가지 실마리를 얻은 듯하다. 언제나 포식자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먹이사슬 하단부의 동물들은 깃털을 곤두세우거나 눈을 희번덕거리며 위협의 제스처를 취한다. 즉 주변의 폭력에 맞서 자기 스스로 폭력성을 연기하는 것이다.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가해자인 것처럼 스스로를 위장하는 것이다. 작가는 약자의 위치에서 분노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폭력을 위장하는 유사한 제스처를 발견한다. 한밤중에 나무 위에 올라가 위태롭게 나뭇가지를 붙들고 서 있는 어린아이는 눈에 섬뜩한 쌍심지를 켜고 있다(<요동치다>). 이처럼 사회적 약자의 자리에 놓인 어린아이는 두 눈을 부라리며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폭력성을 연기하는 것이다.
폭력을 위장하는 이런 전략은 생존을 위해 꽤나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조원득은 위장의 전략이 내포한 위험성을 잊지 않고 지적한다. 그것은 폭력을 위장하다가 폭력을 내면화해 버리게 될 위험성이다. 즉 폭력이라는 괴물과 맞서 싸우다가 스스로 괴물이 되어 버릴 위험성이다. 잘못된 게임의 승자를 위협하기 위해 연기하던 패자의 폭력적 제스처가 부지불식간에 폭력 그 자체의 행사로 변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만일 폭력이 일종의 질병이라면 그것은 난치병일 뿐만 아니라 지독한 전염병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내면화된 폭력은 게임의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행사된다. 정면의 무언가를 응시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을 보라(<그 순간>). 하나같이 거부와 외면의 의사를 담은 폭력적인 시선들이다. 다만 한 어린아이만이 옅은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아이가 곧 겪게 될 사회화 과정을 상상해 본다면 아마도 그 미소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폭력과 맞서 싸우면서 폭력을 내면화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사회적 폭력의 구조적 근원, 달리 말하자면 잘못된 게임의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규칙을 끈질기게 누설하고 폭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원득이 회화를 거울삼아 짊어지고 길목을 누비면서 하고 있는 일이리라.
 
 
- 환자인 동시에 의사인, ‘상처 입은 치료자로서의 한 전형 -
 
김 동 화 (金 東 華)
 
작년(2017) 늦가을의 어느 한 날, 필자는 바람도 쐴 겸, 전시도 볼 겸 해서 집사람과 함께 양구에 있는 박수근 미술관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날 일정이 다 끝나고 막 집으로 돌아가려는 찰나에 엄선미 관장님께서 미술관의 입주 작가 스튜디오를 안내하면서 그 곳에서 몇 달간 작업을 하고 계셨다는 젊은 작가 한 분을 소개시켜 주셨다. 차분하고 단정한 외모나 말없이 조용한 태도와는 달리, 스튜디오 벽에 걸려 있는 작품들의 면면에선 주로 폭력이나 죽음, 사체나 절단의 이미지들이 즐비했다. 화가에 대한 느낌이 표면이라면 그림에 등장하는 도상은 이면이다. 그런데 만일 보이는 표면과 보이지 않는 이면 사이에 서로 맞닿기 어려운 극단적인 이격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감추어진 이면의 역동을 억압하는 드러난 표면의 은폐 역시 현저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극적 불일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작가 자신의 정서적 생존을 위한 긴박한 방어기제가 적극적으로 개입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림의 광포함과 작가의 수줍음, 이 두 대립면의 간극에 대한 합당한 설명의 과정이야말로 그녀의 내면 풍경을 독해하기 위한 일련의 심리적 여정이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림의 내용을 하나의 증상으로 이해하고 본다면, 거기서 우선적으로 읽혀지는 문맥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가학과 피학의 꼬리 물기이다. 화면 속 쓰러진 사슴들의 주검 - 피학자 - 이면에는 활을 쏘는 과녁의 존재가 암시하는, 사슴을 쏘아 죽인 인간 - 가학자 - 이 숨어있는 것이다(지독한 숲, 2017). 과녁을 맞히겠다는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무고한 생명들의 희생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그 활 든 자들의 잔혹함이 바로 고금의 권력자들이 공유했던 가장 보편적 지독함이 아닐까?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불공정한 규칙을 만들고 그 부당한 규칙에 저항하거나 거스르는 모든 자들을 혹독하게 탄압하거나 사정없이 제거해 버린다. 또한 산야 위에 여기저기 흩어져 쌓여 있는 절단된 나무들 - 피학자 - 의 이면에는 그 나무들을 사정없이 베어버린, 표면으로부터 감추어진 벌목자 - 가학자 - 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2017-2018). 또 다른 한 점의 그림(잘못된 게임, 2016)에서는 아예 주먹을 날리는 사람과 주먹에 맞는 사람이 동시에 한 화면 속에서 마치 돌직구를 날리듯 직설로서 폭로되고 있다. 이러한 화면의 내용들은, 병리적 증상으로서의 폭력에 대한 지독한 은유와 직유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작품(요동치다, 2016)에선 수직적 권력구조에서 유래하는, 그리고 폭력을 매개로 하는 가학과 피학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이 매우 선명하게 노출되고 있다.
 
이러한 작업 결과물로서 드러난 현상의 이면에는 그 현상 이전에 이미 선재(先在)하고 있는, 인자(因子)로서의 원체험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작가 자신의 발달사적 경험이 바로 그것인데, 알코올 의존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가했던 가정 내 폭력의 장면들이 유년기 작가의 내면에 가학과 피학의 원형으로서 깊이 각인되어진 것이었으리라. 그녀의 작업에 등장하는 가학자의 원형은 자신의 아버지라 볼 수 있고, 피학자의 원형은 자신의 어머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현장에서 이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상당히 긴 세월에 걸쳐 누적되어온 크리티컬(critical)한 트라우마(trauma)야말로 지금의 작품 안에 드리워져 있는 작가 자신의 심리적 불안감의 아키타입(archetype)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실로 그녀의 작업은 피학자로서의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달래는, 애절한 자기 치유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러한 개인적 경험이 표현되고 있는 작업의 내용들을 그저 작가 자신의 사적 내러티브만의 나열이라거나 반복으로서만 한정해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물론 자신의 내적 경험들이 가학이나 피학의 문제에 대해 남들보다 유독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극도로 예민한 촉수를 형성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 사회 안에서도 전술한 가정 내에서의 병리적 패턴이 그대로 반복, 재현되고 있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인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결국 작가의 심리적 문제는 이 사회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기술하는 하나의 단초가 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자신의 불행했던 개인적 경험이 오히려 이 사회 안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유사 현상들을 고발하고 파헤칠 수 있는 유용한 맥락을 형성해 나가게 된 것으로 파악해 볼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녀는 이 작업들을 통해, 또 자신의 고통스런 체험을 통해, 이 사회의 병적 구조 속에서 희생양이 되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불특정 다수들을 위한 상처 입은 치료자(wounded healer)’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 : 15)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브리서 2 : 18)
 
그리스도는 무한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셨다. 초월자가 연약함의 옷을 입고 다가와야 비로소 유한자는 무한을 감지하고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히브리서의 저자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體恤)하시는 분으로 기술하고 있다. 실로 그러하다. 우리의 대제사장께 치유의 능력이 흘러나오는 까닭은 이미 그 자신이 모든 고난을 몸소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 고난의 체험이 바로 그와 동일한 고난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낮고 연약한 자들을 지금껏 신실하게 돕고 계시는 것이다. ‘체휼이란, 함께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체휼함은 아픔을 겪지 않았거나 고통을 받아보지 않은 자들로서는 결코 수행해 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감정 전달의 방식이자 상호 연합의 체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에게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타인의 아픔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한 마음은 물론, 지금-여기에서 아픔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위로자가 될 수 있는 합당한 자격도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녀의 작업 행위 안에는 스스로의 체험을 반추하며 이를 내면화하는 겪음(suffering)의 과정과 이를 다시 화면 속으로 투사하고 해소하는 치유(healing)의 과정 - Intra-process, 그림을 매개로 하는 자기내적 와병 및 회복의 과정 - 이 함께 공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내적 경험을 통해 타인의 감정에 다가서고 공감하려는 측면 - Inter-process, 그림을 매개로 타자를 자신의 경험 체계 속으로 편입시키려는 과정 - 까지도 더불어 포괄하고 있다.
 
그간의 작업 과정들을 통해 그녀가 주목하게 된 중요한 지점은 규칙의 문제이다. 그녀의 작가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게임에는 항상 규칙이 존재하고 게임의 참여자는 반드시 그 규칙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나는 정해진 규칙에 잘 따르던 그들이 애초에 게임의 규칙 자체가 잘못 설정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으로부터 출발하여 현재까지 그것을 여러 작업들을 통해 예증하고 있다.
 
아마도 게임이란 우리의 인생을 은유하는 것이리라. 이 게임을 유지하게 하는 규칙의 핵심은 공정함과 평등함, 즉 공평과 정의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덕들은 힘의 위계에 의해 순식간에 압도되거나 붕괴되어져 버리게 된다. 이것은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인간사에서 끊임없이 벌어져온 무수한 전쟁들, 그리고 전제 군주나 독재자들의 압제, 나면서부터 절대로 바뀔 수 없이 고착되어진 신분과 계층구조 등에서 그 예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은 가정 내 부부간 혹은 부모 자식 간에 일어날 수 있는 폭력 행사들의 외연적 확장 현상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든 이 무참한 가학에 노출된 희생양을 통해 전체 집단 구성원들의 공포를 최대치로 증폭시키면서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그 규칙에 순응하도록 만들어버린다. 일종의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는 것이다.
 
체제의 모순이나 부조리에 노출된, 그래서 깊은 불안에 휩싸인 한 피학자로서의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단 두 가지뿐이다. 첫째는 가학자의 초인간적 권위를 내면화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은폐시키거나 굴욕의 감정을 부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노출시켜 동일한 상처를 가진 다수와 연대하면서 부당한 규칙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녀의 그림에 등장하는 벌거벗은 군상들은 자신의 상처를 전적으로 과감하게 드러내고 이를 새로운 방식으로 극복해 보겠다는 정신내적 외침이자 절규이다. 그녀가 자신의 방어적 억압 속에서만 그저 머무르지 않고 이를 오픈하면서 다수의 상처 입은 대상들과의 연대를 통해 피학적 상처의 경험을 마침내 역전시키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이 벌거벗은 인물들의 형상으로 압축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가장 드러내기 어려운 개인적 경험들을 힘겹지만 과감하게 외부로 표현하는 용기 있는 모습 속에서, 은유로서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그 전말을 폭로하고 있는 과정 속에서 이미 선명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숲으로 은유되는 이 지독한 세계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서로 죽고 죽이는 대립항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응시란, 자신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임과 동시에, 결국 그 세계를 피학자들의 연대를 통해 역전시키겠다는 견강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한 것이다.
 
필자가 금년(2018) 2월 초에 작가의 스튜디오를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전에는 미완의 단계에 있었던 작품들 - ‘여기 아닌 저기(2017)’, ‘(2017-2018)’ 이 완성되거나 그때보다는 훨씬 더 많이 그려져 있었다. 작년 11월 말의 첫 번째 방문 당시에는 전반적으로 엷게 그려져 있었던 작품들이, 반복해 쌓아 올린 채색의 효과로 인해 완성도가 상당히 높아져 있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그녀의 작업은 일상적인 풍경 속에 낯선 기분이나 의외의 느낌을 풍기는 어떤 하나의 대상을 화면에 돌연히 제시하면서, 평범한 공간 속에 갑작스러우면서도 기이한 기운을 강렬하게 주입시키고 있었다. 풀숲에 물웅덩이 하나를 그려 넣는다든지(가득 차있지만 텅 빈 것, 2018), 평범한 마당 안에 뿌리가 드러난 나무의 그루터기를 턱하니 놓아둔다든지(이율배반, 2018), 시멘트 블록 벽으로 둘러싸인 평범한 공지(空地) 한쪽에 눈 맞은 모래더미를 난데없이 그려 넣음으로서(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 위한 발견, 2018), 어떤 원인을 알 수 없는 긴장감이나 심상치 않은 정서들을 불쑥 환기시키고 있었다. 작품 여기 아닌 저기(2017)’에서 사슴이 있는 숲에 지뢰 표시를 그려 넣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들은 모두 자신이 표현하려고 하는 주제의식을 전면으로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암시적 무대장치로서의 후경(後景)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임옥상(林玉相)1980년대에 제작한 그림들 일부에서 풍기는 에이리언(alien)한 분위기나 감흥과도 일면 유사했다.
또 불타는 숲속에서도 타들어가지 않고 있는 인물상을 그린 작품(끝까지 서있는 사람, 2017-2018)의 경우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동상(銅像)을 그린 것이라 했다. 작가는 과거에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일어날 수 있는 감당하기 어려운 파국적인 사건들 불타는 숲과도 같은 지독한 상황들 속에서도, 마치 불타지 않는 아니 불탈 수 없는 동상처럼 그렇게 꼭 살아남아야만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그림 속에서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불타는 숲, 바로 그 지독스런 생의 파란과 곡절들을 오롯이 다 겪어낼지언정, 절대로 그 속에서 치명상(致命傷)을 입지 않기 위해서는 이처럼 견고한 동상이 되어, 철피(鐵皮)나 동피(銅皮)로서 부드럽고 연약한 내피(內皮)들을 꽁꽁 싸매고 그 전부를 덮어버려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은 무정하고 잔혹한 세상의 구조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비인간화 되어져버린 존재들의 깊은 슬픔과, 온몸에 철갑을 두르고서라도 꼭 살아남고 싶었던 약자들의 모든 비극을 절절하고도 생생하게 일깨우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시멘트로 만든 가짜 나무 하나를 가져와 숲속에 세운 다음, 여러 개의 철골들을 그 가지에 붙여서 마치 그것이 진짜 살아 있는 나무처럼 보이도록 꾸미고 있는 장면을 담은 그림(가짜 나무, 2018)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시멘트로 만든 나무는 실제로 살아있는 나무처럼 상처받거나 쉽게 잘려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단단하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로 살아 있는 나무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감수성을 잃어버린 죽은 나무들의 가장 전형적인 속성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마치 죽은 나무처럼 단단해져야만 하는 비정한 조건 - 지독한 숲 - 속으로 몰리고 몰려진 인간 - 나무 - 들의 처지에 대한 애도로서의 절묘한 은유에 다름 아닌 것이다.
나무 밑동에 백기가 꽂힌 모습이 그려져 있는 또 다른 한 작품(치열한 각축전에서 탈락한 사람, 2018)은 불공정한 생존 경쟁에서 밀려난 패배자들이 외치는 고통스럽고 처절한 아우성을 소리 없이 들려주고 있었다. 또한 이것은 소외된 낙오자들에게 동병상련의 애달픈 심정을 투영하고 이입시키면서, 애정 어린 눈빛과 따스한 손길로 그들을 보듬고 있는 작가의 결 고운 심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요컨대 예술 작품 - 회화 - 이 한 작가 개인의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문제의식에 대한 형상적 해석이라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문맥과 지평 속에서 도출되는 것이며, 다시 그것이 보편적 인류(mankind)와 근원적 인간성(humanity)에 대한 문제의식, 즉 사회적, 역사적, 구조적 지평으로까지 끊임없이 확장되어 해석되어질 수 있는데, 그간 지속되어온 조원득의 다년간에 걸친 작업들이야말로 지극히 내밀한 개인사적 내러티브인 동시에, 종내는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의 왜곡되고 삐뚤어진 현실상(現實相)의 고발과 그 해석에 대한, 가장 오래된 아키타입(archetype)이자 가장 새로운 키노타입(kenotype)으로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Jo Wondeuk Exhibition: A Model of the ‘Wounded Healer’ Who is Both a Patient and a Doctor
 
Kim, Dong-hwa (金 東 華)
 
 
 
One day in late autumn last year (2017), I had visited Park Soo Keun Museum in Yanggu with my wife, to get some fresh air as well as to see the exhibition. The schedule was over and we were about to set out to go back home when the director Eum, Sun-mi took us to the resident artist’s studio, and introduced us to a young artist who had been working there for a few months. Contrary to her calm and neat appearance and silent demeanor, her works hanging on the walls of the studio were loaded with images of violence, death, carcasses, and amputation. If my impression of the painter were the surface, the images that appear in the pictures would be the other side. However, if there is an extreme distance between the visible surface and the invisible reverse that can hardly be narrowed, it also means that the concealment of the exposed surface, which represses the dynamics of the hidden back side, is also remarkable. In other words, this means the urgent defense mechanism of the artist for emotional survival is actively involved in this dramatic discordance. I came to have the impression that the process of reasonable explanation of the gap between these two extremesthe frenzy of the paintings and the timidity of the painterwould be a series of psychological journey to read her inner landscape.
 
If you understand the contents of the paintings as a symptom, then the context that you comprehend first is the chain of abuse and victimization that is constantly repeated. Behind the dead bodies of deerthe victimizedthat have fallen in the canvas are hidden thosethe victimizerwho have shot the deer, which is suggested by the presence of the target for arrows. (A Violent Forest, 2017) Isn’t it that the cruelty of those holding bows, who do not have pity for the sacrifice of the innocent lives to achieve their desire to hit the target, is probably the most common atrocity of those in power in history? They make unfair rules for themselves and harshly oppress or ruthlessly get rid of all those who resist or violate the unjust rules. And behind the cut-off treesthe victimizedthat are scattered all over the mountains and fields are the woodcuttersthe victimizerswho, hidden from the surface, have cut the trees without mercy (Forest, 2017). In another piece of painting (The Game of Contradiction, 2016), we see a naked scene which simultaneously exposes both the person who wields the fist and the person who is hit by the fist. These paintings contain the vicious metaphors and similes of violence simultaneously as a pathological symptom. Another work (Jolting, 2016) very clearly exposes psychological anxiety about abuse and being abused, which originates in the hierarchical structure of power and is accompanied by violence.
 
Behind the phenomenon that has surfaced as a result of this kind of work, there is bound to be an original experience as a factor that already exists before the phenomenon. That is the artist’s own developmental experience. It is presumed that the image of the father with alcohol dependence and the scenes of domestic violence that the father used against the mother were deeply imprinted on the psyche of the artist in her childhood as a prototype of abuse and victimization. We may assume that the prototype of abuser that appears in her work is her father, and the prototype of the victimized is her mother. In addition, we may presume that the critical trauma accumulated over a long period of time while she has experienced violence repeatedly on the very spot must have become the archetype of the artist’s own psychological anxiety which overshadows her present work. In this sense, her work indeed contains the significance of mournful self-healing, which would comfort and appease her own wounds and pains as an abused one.
 
Nevertheless, we should not set limits to the contents of the work by merely regarding that such personal experiences are expressed as enumeration or repetition of the artist’s personal narratives. To be sure, it would be hard to deny that her inner experiences have caused the formation of extremely sensitive tentacles that allow her to respond to the problem of abuse and victimization in an unusually sensitive manner. However, it is also undeniable that the above-mentioned pathological patterns in the home are repeated and reproduced in the society in which we live. It is therefore a problem which is both personal and social.
 
Then we might understand that in the end, the psychological problem of the artist can be a starting point for describing the structural problems of this society, and her own miserable personal experiences have formed a useful context that would help her to criticize and explore similar problems that are frequently occurring in this society. Perhaps thorough these works and through her own painful experiences, she is carrying out the role of a ‘wounded healer’ for many anonymous individuals who suffer as victims of the structural problems of this society.
 
 
For we have not an high priest which cannot be touched with the feeling of our infirmities; but was in all points tempted like as we are, yet without sin.
(Hebrews 4: 15)
 
For in that he himself hath suffered being tempted, he is able to succour them that are tempted.
(Hebrews 2: 18)
 
Christ, despite being an infinite and perfect Son of God, was incarnated as a finite and imperfect human being. It is because the absolute being must come closer in the clothes of weakness first so that the finite being can perceive and recognize infinity. The author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in the New Testament describes Christ, the perfect High Priest, as one who sympathizes with our weaknesses. He does indeed. The ability of healing flows from our high priest because he himself has already gone through all sufferings. The experience of the suffering is the very source of his healing power for the low and weak people who are groaning in the same adversity. ‘Sympathy’ is an act of sharing pain and suffering together. Therefore, ‘having sympathy’ is a very unique way of communicating emotions and a system of mutual unification that can never be carried out by those who have not undergone suffering and pain. In this sense, the artist is already given a bold heart to move towards the pain of others through her own experience, as well as the rightful qualification to be a good comforter for all those who are suffering here and now.
 
Her working process contains the process of suffering to ruminate on her own experiences and internalizes this, the process of healing to project this onto the canvas and resolve it (Intra-process), and the process of inner suffering and recovery by means of painting. Further, her work includes the intention of approaching the emotions of others and having sympathy for them on the strength of her own inner experience (Inter-process) and even the process to incorporate others into her system of experience through the medium of painting.
 
Throughout the course of her work, the important point that she has noticed is the problem of ‘rules’. Her notes have the following lines:
 
There are always rules in a game, and the participants of the game must follow them. However, although they followed the established rules, I came to have the suspicion that the rules of the game themselves might be erroneous in the first place, and starting from the suspicion, I have illustrated it up to now in various works of mine.
 
Perhaps the game is a metaphor for our life. The key to the rules set to maintain this game is fairness and equality, that is, equity and justice. However, these virtues either collapse or are overwhelmed by the hierarchy of power in an instant. Examples of this can be found in the countless wars that have been constantly taking place in human history from old times, the oppression of the tyrants and dictators, and the structure of status and hierarchy that can never be changed from one’s birth. And this is also an external expansion of violence that can occur between spouses or between parents and children. Any society, through the scapegoat exposed to the brutal victimization, amplifies the fear of the whole members to the maximum, making them voluntarily conform to the rules. A kind of silent cartel is formed.
 
There are only two of the number of cases that an individual can choose as a victim exposed to irregularities and absurdities of the system, and thus deeply disturbed. The first is to internalize the superhuman authority of the abuser and conceal one’s own wounds or deny the feeling of humiliation, The second is to expose one’s own wounds as they are and stand against the unjust rules by cooperating with others who have similar wounds. The naked group of figures in Jo Wondeuk’s paintings represent the inner cries and screams in order to boldly reveal her own wounds and overcome them in a new way. These naked figures represent her indomitable will that she would not just be content with her own defensive oppression, but open it up, and eventually reverse the experience of suffering through solidarity with a number of wounded subjects. This is already evident in the courageous act of boldly expressing her personal experiences that are difficult to expose, as well in the process of disclosing the whole story by means of metaphors in her works. The artist’s persistent gaze on the dying and killing confrontations that are fiercely waged in this dreadful world, which is symbolized as a forest, is an act of encounter with her own wounds as they are, and ultimately, a statement of a firm will to overthrow the world through the solidarity of the victimized.
 
When I visited the artist’s studio for the second time in early February this year (2018), works that had been at an unfinished stageNot Here, But There (2017) and Forest (2017)were completed or done much more than before. At the time of the first visit in late November last year, there were works which had been thinly painted. But this time, they were greatly improved due to the effect of repeated, accumulated coloring of paints.
 
Overall, her work suddenly presented a single object that has an unfamiliar atmosphere or unexpected feeling in an everyday landscape, and infused an abrupt and strange aura into an ordinary space. At that time, her works were abruptly evoking some mysterious tension or unusual emotions by painting a puddle among the grass (Something Full Yet Empty, 2018), or placing a tree stump with its roots exposed in an ordinary yard (Antinomy, 2018), or drawing a pile of sand out of the blue in a corner of a common empty lot surrounded by walls of cement blocks (A Discovery Not to Take for Granted That Which Seems Natural, 2018). The same is true of drawing the sign of the land mine in the forest of deer in Not Here, But There (2017). All of these served as the background as an implicit mise en scène for vividly expressing the subject matters that she intended. This was similar to the alien atmosphere and zest that some of the paintings Ok Sang Lim had produced in the 1980s.
 
About the work in which a human figure is standing unburned in a burning forest (A Person Standing to the End, 2018), she said it depicts not a living person but a bronze statue. The artist said that she wanted to express her determination to survive whatever happens, just like the bronze statue that does not burn and cannot burn, in the face of the catastrophic eventsterrible situations like the burning forestthat had happened to and around her in the past and, perhaps may happen again in the future. Though she may have encountered the burning forest, the terrible ups and downs of life, she must probably have become the sturdy bronze statue not to be fatally wounded, wrapping and covering the soft and fragile inside with the iron or bronze skin. This was vividly reminding me of the deep sorrow of the beings who had to be dehumanized for their survival in a merciless and cruel reality, as well as the tragedy of the weak who were desperate to survive even though they had to cover themselves with iron armor all over their body.
 
Next to it was hanging a painting of a fake tree made of cement, which is planted in the woods, with several steel frames attached to its branches so that it looks like a real tree (Fake Tree, 2018). The tree made of cement does not get hurt or nor is cut off like a living tree. It is hard, though it is not a real, living tree. Rather, it is the most typical attribute of dead trees that have lost their sensibility. Therefore, it is nothing but an exquisite metaphor of the mourning for the plight of humansthe treethat were driven into the inhuman conditionsthe terrible forestin which they had to turn hard like a dead tree to survive.
Another piece depicting a white flag put on the stump of a tree (The Person who Have Fallen Behind in the Cut-throat Competition, 2018) was quietly voicing the painful and heartbreaking screams of the losers who were pushed out of the unfair competition for survival. It also allowed me to feel the good heart of the artist, who was projecting her sadness onto and empathizing with the marginalized dropouts, and embracing them
with her warm hands.
 
In short, if we can say that a work of artpaintingis a figurative interpretation of the unique and irreplaceable sense of problem of an artist, it is primarily derived from the context and horizon of her actual life, and it can then be constantly expanded and interpreted into the sense of problem of universal mankind and fundamental humanity, that is, into social, historical, and structural horizons. Jo Wondeuk’s work that has been going on over the years is a very personal narrative, and at the same time, it ultimately results in the oldest archetype and the newest kenotype of accusations and interpretations of the distorted and crooked reality of this world we now live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