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적 신체로서의 얼굴
 
 
작가 조원득의 작품소재는 인간의 얼굴이다. 작가는 자신과 타인의 얼굴표정을 세세하게 화폭에 그려낸다. 일체의 색을 다 빼버리고 목탄과 검은색 분채, 호분과 젯소를 사용하여 흑백명암으로 처리한 얼굴은 사뭇 괴기적이다. 이러한 표현은 신비하면서도 화려한 색감을 추구하던 그녀의 이전작업에서 색감이 가진 의미의 군더더기를 모두 없애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그것은 예술적 언어에 대한 기대와 오해, 그리고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는 작가라는 행동양식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마치 흑백사진이 컬러사진에 비해 더욱 사실적이고 풍부한 이야기를 전달해주듯이, 그녀의 작품은 초상화가 가진 재현적 영역을 크게 벗어나 단지 얼굴의 모습이 아닌 그 이면에 있는 함축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여기서 얼굴은 소녀이자 작가 자신이며, 언니,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오빠의 모습이다. 바로 가족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얼굴의 표정들은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고, 혹은 아픔을 애써 참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왜 이들의 모습은 이처럼 우울하며, 불행한 표정들일까? 이러한 물음은 작품의 의미를 상처, 트라우마, (), 자기연민이라는 이야기로 몰아간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단지 상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 속에서 결정지어지는 인간의 삶과 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타인과의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또는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아픔의 경험, 그리고 그것의 기억을 표현한다. 특히, 그녀는 작품의 시발점인 가족구성원에서부터 사회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힘과 권력, 남성과 여성, 강자와 약자와 같은 이분법적 원칙이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는 사회시스템에 대해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저항의 의지를 표명한다.
작품 <날 닮은 남자>, <날 닮은 여자> 시리즈는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고스란히 닮아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아픔과 상처라는 것이 단지 타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것임을 인식하게 한다. 그러나 자아는 사회적 구조에 의해 생겨난다. 사회적 삶이라는 굴레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돌고 돌아서 언제나 아픔을 만들어내는데 작가는 이러한 굴레를 무의식의 밑바탕에 자리하는 아픔의 그림자라고 지칭한다. 언제나 자신을 따라다니며 아픔이라는 기억을 상기시키는 자아의 무의식적 그림자는 사회적 역할 시스템을 몸으로 익히게 한다. 그것이 바로 억압인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미지는 사회적 약자로서 상처를 간직하게끔 유도하는 신체적, 정신적 억압시스템에 반대하고 도전하는 저항적 신체로서 자아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녀의 작품에 괴기스러움과 그늘이 서려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처에 대한 기억을 속 시원히 다 토해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픔을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고자 한다. 정화는 자신의 모든 것들을 토해내어 카타르시스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카타르시스는 단지 자기만족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삶과 관계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한다. 자신의 아픔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의 극복의지를 내비치는 그녀의 작업은 바로 자아성찰의 과정인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고립되고 소외된 자아는 그녀 자신이자 상처를 간직한 모든 이의 모습이다. 거기엔 상처를 주는 사람 또한 포함된다. <약육강식>의 체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약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깃을 세워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위협을 가해야 한다. 마치 동물들의 싸움처럼.
작가의 얼굴은 바로 이러한 그림자를 간직한 사회적 인간의 표현인 것이다. 흑백의 그림은 이제 사회 구조에 대한 저항을 넘어서 치유를 드러낸다. 이러한 신체를 통하여 그녀는 가족, 그리고 사회구성원 등 모든 사람들의 관계를 긍정으로 되돌려 놓고자 한다. 그것은 관계 맺기의 능동적 통로인 내면적 자아와의 만남인 것이다.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기엔 우리 모두의 얼굴이자 얼굴의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다.
 
| 백 곤 미학